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지카타 토시조 (문단 편집) === [[보신 전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S20200214004961_comm.jpg|width=100%]]}}} || || {{{#ffffff ''' 1868년[* [[하코다테 전쟁]] 당시 찍은 사진. 사진 작가는 타모토 겐조(田本研造).]''' }}} || 하지만 신센구미의 영광도 오래가지 못했다. 신센구미의 뒤를 받치고 있던 막부는 [[사쓰마 번]],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에 밀렸고, 마침내 [[1867년]] 6월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이에야스 이래 260년간 지켜온 정권을 조정에 반납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납은 형식적인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정치의 우두머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요시노부의 강경한 계산이 있었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막번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선수를 쳐 정권을 돌려줌으로써 도막파의 칼끝을 피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힘을 온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간신히 에도 막부는 망했지만, 도쿠가와 가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반막부세력인 삿초[*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줄임말.](薩長) 측 입장에서 보면 불충분한 것이다. 삿초 측은 막부에서 이름을 바꾼 다른 정체 아래에서 여전히 도쿠가와 가문이 정치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도쿠가와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한 삿초 측은 왕정복고 대호령을 내리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사관 납지(즉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을 박탈한다는 것이다.)를 하명했다. 이에 반발한 구 막부 세력과 삿초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이 교토 남쪽 교외의 도바, 후시미에서 격돌. 보신전쟁의 서전이 되는 도바-후시미 전투가 발발했다. 당시 히지카타는 부상을 당한 콘도 대신에 신센구미를 이끌고 분투했다. 그러나 사쓰마 소총대 앞에 대패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히지카타는 서양식 군비의 필요성을 깨달아 군대를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에서 몰래 에도로 도망쳐 돌아온 것을 두고, 신센구미도 에도에 귀환한다. 1868년 곤도와 히지카타는 신센구미를 이끌고 신 정부를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싸웠다. 신센구미는 에도로 돌아와 나중에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 부대로 개편되었고, 3월 24일 에도에서 고후 성으로 출발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3월 28일, 그들은 고후 성이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이끄는 궁정군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후에서 동쪽으로 5m 떨어진 가쓰누마 마을에 정착했다. 여기서 신센구미는 신정부군과 싸운다. 다만 히지카타는 진군의 도중에, 원군 요청을 위해서 에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가쓰누마 전투는 신정부군에게 먼저 고후성을 빼앗긴 적도 있고, 병력 자체도 완전히 뒤떨어졌기 때문에 고요진 무대의 참패로 끝나고,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에도로 도망쳤다. 이 싸움의 결과, 곤도를 단념한 [[나가쿠라 신파치]]와 [[하라다 사노스케]]가 신센구미를 탈퇴한다. [[오키타 소지]]도 결핵 투병 중이어서 이미 옛날 신센구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지나 병사들이 차례차례로 이탈하는 가운데, 히지카타는 에도에서 착실하게 모병 활동을 계속하면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1868년 4월 11일, 곤도와 히지카타의 갑양진무대는 다시 에도를 떠나 에도 북동쪽에 있는 가네코 가문에 임시 본부를 세웠다. 이후 1868년 4월 25일 나가레야마 본부로 이전하였다. 1868년 4월 26일 나가레야마에서 훈련하는 동안, 곤도가 단독으로 이끈 갑양진무대는 사쓰마 번의 아리마 토타 참모차장이 이끄는 200명의 신정부군에 의해 기습당했고, 곤도 이사미는 고시가야에 있는 그들의 진지로 함께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곤도 이사미는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스스로 칼을 빼들고 [[자결]]을 하려고 했지만 히지카타가 만류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 싸우자며 출두를 종용했다고 한다. 곤도는 1868년 4월 27일 심문을 위해 이타바시로 보내졌다. 같은 날, 히지카타는 [[가쓰 가이슈]]를 만나러 에도로 가서 곤도를 사면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이튿날, 이타바시에 도착한 전령은 가쓰가 쓴 편지와 함께 곤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전령은 체포되어 거절당했다. 당시 곤도의 체포와 재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곤도 이사미]]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10920_002520.jpg|width=100%]]}}} || || {{{#ffffff ''' 보신 전쟁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의 행적[* 홋카이도의 상륙지 「와시노키초」, 구 막부군의 거점 「고료카쿠」, 히지카타가 함락시킨 「마쓰마에 성」, 후타마타 전투가 벌어진 「후타마구치」.]''' }}} || 곤도는 1868년 4월 30일 재판 후 5월 17일 이타바시 처형장에서 처형되었다.[* 곤도는 구 막군의 잔당의 두목으로서 포박되었지만, 일찌기 쿄토에서 반막부 활동가를 몇 사람이나 저승에 보낸 신센구미의 수령이라고 눈치채지 못하면, 무거운 처벌은 면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 기대는 배반되고, 정체가 알려진 곤도는 이타바시에서 참수 되어 버린 것이었다.] 동지 곤도를 잃은 히지카타였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다. 1868년 4월에 [[에도성]]이 신정부군의 손에 떨어지자, 히지카타는 에도를 탈출하며, 신정부군을 토벌하는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 히지카타는 북쪽으로 향해 구막부 보병대를 인솔하는 오토리 케이스케와 함께, 우츠노미야성에서 신정부군과 상대해, 한 번은 우츠노미야성을 함락시켰지만, 후에 신정부군의 반격에 부딪혀 전투중에 다리를 부상당한다. 그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이즈 번에 잠복했다. 히지키타는 아이즈 번에 곤도의 머리카락을 가져다 주었으며, 텐네이지 사에 있는 곤도의 묘소 건립을 직접 감독했다고 한다. 그 후, 히지카타가 전열에 복귀해도, 구 막부군과 신센구미 등은 보나리 고개의 싸움에서 져 아이즈번의 방어는 곤란하게 되었다. 1868년 10월 7일, 보나리 고개 전투 이후, 히지카타는 이나와시로 성에서 [[사이토 하지메]]를 만나 와카마쓰의 사이토야 여관에 머물렀다. 히지카타가 아이즈 번에서 후퇴하기로 결정하자, 사이토와 소수의 신센구미 군단은 히지카타와 결별하여 끝까지 아이즈 전투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히지카타는 [[센다이]]를 향해 구 막부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한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합류했다. 오쿠우에쓰 열번동맹에 기대를 걸었지만, 이 동맹도 차례차례로 신정부군에 항복해 붕괴된다. 도호쿠 제번이 신정부군의 군문에 내려와서는 이제 마지막 진은 [[홋카이도]]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히지카타는 자신이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의사 마츠모토 료준[* 보통 마츠모토 준(松本順)이라고 불린다.](松本良順)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도쿠가와 정부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아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고의 투쟁을 벌이겠습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4uSgqOTBKs)]}}} || || {{{#ffffff ''' 히지카타 토시조, 하코다테에서 죽다[* 하코다테 전쟁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의 일대기를 정리한 방송. 썸네일의 여자 리포터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사람은 중국인으로 이 시대의 일본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며, 인터뷰 도중 우연히 잡힌 장면이다.]''' }}} || 1868년 10월, 히지카타는 에조치에 상륙했다. 히지카타는 [[오토리 게이스케]]와 병력을 이끌고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한다. 오토리 케이스케와 히지카타는 먼저 [[미일화친조약]]에 의한 하코다테 개항을 계기로 막부가 축성한 독특한 별 모양의 성곽 [[고료카쿠]]를 함락시키고 지역 저항군을 계속 제거했다. 이후 [[하코다테]]를 점령했으며, 하코다테에 주둔하고 있던 히지카타 토시조는 [[마츠마에초|마쓰마에 성]]을 공격해 전투 끝에 함락시켰다. 히지카타는 마쓰마에 성을 함락시킨 후 잔병들을 [[에사시]]까지 추격했고 에사시도 점령하게 된다. 12월에는 일본 역사의 등장한 최초의 [[공화국]]인 [[고료카쿠]]를 거점으로 한 [[에조 공화국]]이 수립되자, 히지카타는 육군봉행[* 육군 봉행은 과거 에도 막부에 존재했던 직책이다. 과거에는 막부 내에서 보병·기병·포병을 인솔하는 직급이었다.]급(육군참모차장)의 임명된다. 또한 하코다테시 나카이사(中取締)와 육해군 재판국장을 겸임한다. 그의 상관인 정규 육군 봉행으로는 구 막부의 신하인 오오토리 케이스케가 취임했다. 오오토리는 오사카의 적숙에서 난학과 서양의학을 배웠고, 에도의 츠보이학원에서 공부를 했을 정도의 학구파였다. 하코다테 정부가 수립되어 에노모토 등이 축배를 나눌 때에 히지카타 혼자 침묵을 지키며 '지금은 술을 마시고 들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히지카타는 도바-후시미 전투 패전 후부터 특히 신식총에 경도되어 갔다. 실제로 히지카타는 일찍부터 총기 무장을 시도했으며, 재빨리 양장을 도입했다. 당시 히지카타는 용병의 재능과 경험은 물론 전략안으로 크게 인정받기도 했다. 오쿠우에쓰 열번동맹 회의에서는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히지카타 토시조를 전군의 총독으로 추천했다. 그의 상관인 오오토리 케이스케보다 신분이나 경력이 한참 차이나는 히지카타가 육군 봉행같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른바 에노모토의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 히지카타는 '군율에 어긋나면 대번[* 넓은 영토를 가진 제후]의 중역도 베겠다(軍律に背けば、大藩の重役も斬る)'고 발언하기도 했다. 1869년 정월에 히지카타는 에노모토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조직 편성에 의해, 히지카타는 오오토리 케이스케와 함께 함관 정부군의 레지맨(연대)을 묶는 입장에 취임했다. 히지카타의 휘하에는 신센구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사령관 앙드레 카제뇌브[*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일원. 보신 전쟁이 시작되자 구 막부군을 지원하고 하코다테 전쟁에서 싸웠다.](Andre Cazeneuve)와 이바 하치로(伊庭八郎)도 추가되었다. 에노모토의 신뢰로 하코다테 정부군의 군권 대부분은 히지카타에게 맡겨지고 있었다. 당시 신정부 군대는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1869년 4월에는 히지카타가 미야코 만 전투에서 신정부 군함 갑철합(甲鉄艦)을 탈취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른 아침, 많은 반대파들이 카이텐 군함을 통해 배에 승선하였으나, 갑철함이 그 공격을 격퇴하고 개틀링 총으로 격추시켰다. 카이텐 선장을 포함한 많은 다른 사람들도 신정부 선박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30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히지카타와 다른 생존자들은 [[하코다테]]로 후퇴했다. 4월, 사쓰나가 등 메이지 정부의 군이 에조치에 상륙을 개시, 하코다테를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게 된다. 압도적인 전력차로 평범하게 싸우면, 히지카타의 부대는 괴멸해 버릴것이 뻔했다. 게다가 장비하는 총이 히지카타 부대는 엔필드 총이었으며, 신 정부측은 보다 이들보다 더 최신인 원입식 스나이더 총이었다. 1869년 4월 13일, 히지카타는 후타마타 전투[* 2021년 [[NHK]]는 '역사탐정'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현장 조사 및 과학적 분석으로 당시 전투를 재현하기도 했다.[[https://www.oricon.co.jp/news/2207517/full/|#]]](二股口の戦い)에서 600명의 제국군에 맞서 230명의 에조 공화국과 살아남은 신센구미 일원들을 이끌고 16시간 동안 퇴각하였다. 신정부군은 다음 날 다시 공격했으나 후퇴했다. 다음 날 밤, 히지카타는 신정부군의 진영을 성공적으로 급습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했다. 히지카타는 하코다테로 통하는 두 갈래로 진격하는 신정부군을 다이바산(台場山)에 흉벽과 진지를 구축하고 소총으로 방어해 2주 동안 신정부군의 진격을 막았다. 히지카타가 곳곳에 배치한 병사들의 총격과 백병전은 신정부군을 괴롭혔다. 23일에는 신정부군은 800명까지 병력을 늘렸다. 하지만 히지카타의 부대는 끝까지 저항하며 진지에서 십자포화를 퍼붓고 침공을 감행했다. 마침내 신정부군을 철수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히지카타는 이 전투에서 신정부군을 두 번이나 무찔렀다. 그 후 히지카타가 이끄는 군대는 십여일에 걸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전투 모습을 보였지만, 배후에 있던 [[키코나이초]](木古内)가 함락되어 고립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후퇴를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히지카타와 군대는 이후 6월 10일에 고료카쿠로 후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